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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18. 18世 〉10. <부정공>학생공휘석상가장(學生公諱奭祥家狀)
1. 문헌 목록 〉18. 18世 〉12. <부정공>처사휘원순묘지명(處士諱元淳墓誌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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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부정공>학생공휘태상가장(學生公諱台祥家狀)
學生公諱台祥家狀 夫丈夫之生於世也必得其地必得其時必得其位然後乃可以有成不其必得則不可以有成也若吾從祖之剛健武勇得生於京師武將大家夙講武藝鍊習兵戈出入衙營運籌畫策蓄其勇强揚其威武可藩屛於邊腄可棟樑於廈屋功存宗祊名垂竹帛矣奈之何生此遐陬寒門心雖百雄其鞱畧身未一着以甲冑終老以窮閻一布衣而止噫天之降吾從祖於吾家亦何心哉仰天痛歎而巳公諱台祥字昇仲玉川人始祖高麗大將軍諱璋三傳大匡輔國光祿大夫玉川府院君忠獻公諱元吉虔谷先生諱瑜左軍司正 贈吏議諱斯文井邑縣監諱智崑司直諱和監察諱介臣態仁縣監諱大承訓鍊奉事諱珏七世以上也高祖諱維春曾祖諱東耘祖諱新命考諱廷直 贈司僕寺正妣淑夫人淳昌薛氏世蔓女文良公恭儉后公生于 純廟辛酉九月二十一日初解娩呱呱揚聲盈屋達隣家人皆驚異之隣老暘爭臨觀艶稱胎骨之極健實也及長眼若曙星面似赤棗坦途濶步前虎後獅威風凛烈人莫仰視日食斗米時飮斗醪魚殽饌不盈筐不下著瞻畧過人膂力絶倫時人皆以將材見稱若得閫任則周亞夫之凝重庶可及矣其於孝親敬兄愛弟尊賢親親本於彛性篤於庭訓無不各盡其道若當秋冬際作山林狩獵之擧擇健奴數輩載後挽弓馳馬虎豹熊罷萍鹿葛兎箭無不中先以試武藝之赳且以充時食供具射牛作脯以養胃養至嘉俳節福邑大設脚戲之塲列郡賁育之人都會較勝負焉公一爲血勇所勤往觀着戲無可敵手所謂中上賞布俱作囊中物而歸至雲嶺上頂戲中驍勇數十輩成鮮來掠公睨視而起拔一腋松根柱入手即打地張威彼輩鼠匿不敢犯近焉時公之族叔武府使諱鎭溥告老退休于浴川凌波亭上屢試其勇畧而壯之欲爲薦拔一京宰講武試藝俾得進用之資始矣京宰當要未久族叔亦爲捐館巳矣巳矣公之數奇乃至於此奈窮達之在天何 高宗丙寅四月十四日卒于家壽六十六墓道理峰起上麓西局枕乾原配長水黃氏在中女翼成公喜后生戊午忌戊戌五月十日別葬皷岩洞奉事公塋白虎謄壬坐原二男一女永八永一金海金洪奎妻孫龍根長房出達根次房出金天根金炳根金婿二男曾孫一男三女男炳模女適興德張基瑞金海金鎭弼光山金昌鉉嗚呼公不世出之武勇也質何挺特而數何奇薄使此家後輩亦爲追切其不遇之至恨耶不勝於悒書此庸告于來裔焉 從孫 世根 謹述 학생공휘태상가장(學生公諱台祥家狀) 무릇 장부가 세상에 태어나서 그 땅을 얻고 그 때을 얻으며 그 자리를 얻은 연후에야 성공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반드시 얻은 것을 얻지 못하면 성공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 종조의 군세고 건장한 무용(武勇)으로 서울 무장 대가에 생장하여 무예를 배우고 칼과 창쓰는 법을 배워 영문에 출입하며 지모로 주획하고 용맹을 기루어 위무(威武)를 드날렸다면 가히 변방에 울타리가 되고 나라의 기둥과 들보가 되어 나라에 공을 세워 이름을 역사에 남기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 시골 한미한 집안에 태어나 비록 마음과 도략이 웅대(雄大)하였지만 몸에 갑옷 한번 입어 보지 못하고 궁한 집의 한 선비로 늙었단 말인가. 아! 하늘이 우리 종조를 우리 집에 내린 것이 또 무슨 마음인지 하늘을 우러러 슬피 탄식할 따름이다. 공의 휘는 태상(台祥)이요 자는 승중(昇仲)이며 옥천조씨인데 고려 대장군 휘 장(璋)을 시조로 하며 三전하여 대광보국 광록대부 옥천부원군 충헌공 휘 원길(元吉) 건곡 선생 휘 유(瑜), 좌군사정 증이조 참의 휘 사문(斯文), 정읍현감 휘 지곤(智崑), 사직 휘 화(和), 감찰 휘 개신(介臣), 현감 대승(大承) 훈련원 봉사 휘 각(珏)이 七세 이상이다. 고조의 휘는 유춘(維春)이요 증조의 휘는 동운(東耘)이며, 조의 휘는 신명(新命)이요, 고의 휘는 정직(廷直)인데 증사복시정이요, 비는 숙부인 순창설씨인데 세만의 따님으로 문량공 공검의 후손이다. 순조(純祖) 신유(辛酉)년(一八○一) 九월 二十一일에 공이 출생하였는데 처음 해산할때 고고의 울음소리가 집안에 차고 이웃에 사무치니 집안 사람이 다 놀래어 이상하게 생각하였으며 이웃 늙은이가 서로 다투어 와서 보고는 태골이 매우 건장함을 부러워 하였다. 장성함에 눈이 샛별같고 얼굴이 붉은 대추빛 같으며 탄탄한 길을 활보하면 앞 모습은 범이요, 뒷 모습은 사자처럼 위풍이 늠름하여 사람이 쳐다볼 수 없었다. 날마다 한 말 쌀의 밥과 때로는 한 말 술을 먹으며 담력이 보통사람보다 뛰어나고 팔 힘이 절륜하니 당시 사람이 다 장수의 재목이라 칭하였다. 만일 진수(鎭守)로 발탁하였으면 주아부(周亞夫) 같은 명성이 있었을 것이다. 어버이께 효도하고 형을 공경하고 아우를 사랑하며 어진이를 존대하고 친할 사람을 친히 한 것은 떳떳한 성품에 의한 것이요, 가훈에 충실하여 각각 그 도리를 다하지 아니한 것이 없었다. 가을과 겨울 사이에 사냥을 가되 건장한 종 두어 사람을 가려 이에 앞서고 뒷서 활을 당기고 말을 달리면 호랑이 표범·곰·노루 등 산짐승이 화살을 맞지 아니한 것이 없었다. 이처럼 먼저 헌걸차고 날랜 무예를 시험하고 때로는 소를 잡아 포를 떠서 위와 몸을 보위하였고, 八월 보름날 동복읍에서 크게 씨름판을 여니 인근 고을의 맹분(孟賁) 하육(夏育)같은 장사가 모두 모여 승부을 다투는데 공이 한번은 구경하다가 용기가 발동하여 씨름을 시험해 보니 적수 될자가 없었다. 돌아오는 길에 운월재에 이르렀는데 씨름하던때 힘이 센 자 수십인이 작당하여 공을 해치려 하였다. 공은 그들을 노려보다가 일어나 한아름 되는 소나무 한 그루를 뿌리채 뽑아 손에 쥐고 땅을 치며 위엄을 보이니 그들 무리는 쥐가 숨듯하면서 감히 범하지 못하였다. 이때에 공의 족숙 무부사(武府使) 휘 진부(鎭溥)가 퇴로(退老)하여 곡성 능파정에서 쉬고 있었는데 자주 공의 용력을 시험하고 천거하고자 하였는데 오래지 아니하여 족숙이 별세하고 말았다. 공의 운수가 이처럼 박하였는데 사람의 궁하고 현달함이 하늘에 달렸으니 어이 하겠는가? 고종(高宗) 병인(丙寅)년(一八六六) 四월 十四일 六十六세로 별세하였는데 묘는 도리봉 윗 기슭 서국 건좌(乾坐) 언덕에 있다. 배 장수황씨(配長水黃氏)는 재중(在中)의 따님으로 익성공 황희의 후손인데 무오년에 출생하여 무술년 五월 十일에 별세하니 고암동 봉사공 무덤이 있는 백호동 임좌 언덕에 별장하였다. 아들은 영팔(永八)·영일(永一)이요 딸은 김해(金海) 김홍규(金洪奎)에게 출가하였다. 손자 용근(龍根)은 장방출이요, 달근(達根)은 차방출이며 증손자는 병모(炳模)요 증손녀는 흥덕(興德) 장기서(張基端)와 김해(金海) 김진필(金鎭弼), 광산(光山) 김창현(金昌鉉)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아! 공은 세상에 드문 무용을 지녀 바탕은 한없이 빼어 났는데 수는 어찌 그리 기발하여 이 후손으로 하여금 또 그 불우한 지통을 품게 하는가. 답답한 근심을 이기지 못하여 이를 후손에게 고한다. 종손(從孫) 세근(世根) 삼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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